2025. 4. 10. 01:55ㆍ베르세르크
이 글은 그리피스가 가츠를 ‘사랑했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단순한 우정이나 동경이 아니라, 그가 목숨보다 더 아꼈던 존재가 가츠였다는 거죠.
이 포스트가 정답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그리피스란 인물을 해석하는 여러 시각 중 하나인 것이죠.
들어가기 앞서, 그리피스에게 꿈과 가츠는 어떤 존재였는지 봅시다.
꿈과 가츠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가?

이 사진은 그것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그리피스에게 있어 가츠는 동반자입니다. 여유롭게 그와 걷고 있습니다.
가츠는 성보다 크게 그려집니다. 어릴 적부터 꿔온 꿈은 한낱 '색 바랜 고철더미' 따위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녀석은 지금 내 안에서 그 고철더미의 색이 바랠 정도로 반짝이고 있어서 눈이 아프다.'
둘을 저울추에 올리면 일방적으로 가츠 쪽으로 기울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피스에게 있어 가츠란 존재는 꿈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피스가 절망한 진짜 이유는?
애초에 그리피스가 끔찍한 절망을 느낀 순간은 언제일까요? 꿈을 쫓다 마차에서 튕겨나간 순간?
그 절망에 베헤리트가 반응해서 일식이 시작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리피스는 감옥에서 고문받는 내내 가츠만을 생각했습니다. 구출된 그리피스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츠의 목을 조르려는 것이었습니다. 가츠란 인물이 그리피스의 인생에 들어오고부터 꿈은 2순위로 밀려났습니다. 그렇지만 작가는 마치 그리피스의 절망이 꿈으로 비롯된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일식이 시작되기 전, 그리피스가 꿈을 이루지 못해 괴로워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뒤이어 그리피스의 미래에 대한 상상이 이어지죠. 마치 그리피스의 체념을 묘사한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는 독자들이 그렇게 느끼게끔 의도적으로 이렇게 연출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힌트를 숨겨놨습니다.

여기서 그리피스는 멀쩡한 듯 보이지만, 의자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창문도 캐스커가 열어주고, 식사도 캐스커가 먹여주죠. 아이의 이름은 '가츠'네요. 망가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상상입니다.
그리피스는 행복해 보이지 않죠. 죽은 눈을 한 채, 늘 그늘져 있습니다. 꿈을 이루지 못했을까요? 글쎄요.
캐스커가 말합니다.
"요즘은 옛 친구를 볼 수 없게 됐지…."
"당신과 저 아이와 셋이서 사는 거 나쁘지 않아."
그리피스는 결코 가츠를 잊지 못합니다. 상상 속의 자식 이름을 '가츠'로 지을 정도로요. 가츠란 그리피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이 미래엔 없습니다. 가츠가 있었다면 '넷'이라고 했겠죠.
그래서 '이런 안식도 나쁘진 않을지도' 생각하는 순간 베헤리트가 떠오릅니다.
이는 그가 나쁘지 않다 독백했음에도, 상상만으로도 그 절망에 베헤리트가 반응할 정도란 것을 의미합니다.
잘 보세요. 베헤리트는 꿈에 대한 절망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전 장면 어디에서도 베헤리트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각 장면의 눈빛이죠

꿈을 쫓는 그리피스의 눈은 결연합니다. 결코 포기한 자의 눈빛이 아닙니다.
베헤리트의 반응 조건 중 첫 번째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릴 만큼 거대한 절망과 슬픔을 느끼는 것임을 생각해 보세요.
고집일까요? 아니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꿈을 쫓을 수 있다 생각했을까요?
애초에 그리피스가 상상한 미래가 꿈을 이루지 못한 미래이긴 할까요?
상상 속에선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은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과거의 추억'이라고만 할 뿐이죠. 단정적으로 나온 말은 '셋'입니다. 바꿔 말하면 꿈을 이룬 뒤 소박한 삶을 살기로 선택해도 저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에게 있어 절망은 가츠가 없는 미래입니다.
그리피스는 추락합니다. 가츠가 곁에 있는 현재로부터 가츠가 없는 미래로.
'두 번 다시 널'
앞서의 내용을 이후의 장면과 연결시켜 봅시다.

그를 구하러 오는 가츠에게 오지 말라며 절규하는 그리피스.
이때 그리피스는 독백을 합니다.
'두 번 다시 널'
상상 속에서 그리피스는 가츠를 보내줬습니다.
그리고 그런 미래를 애써 '나쁘지 않다.' 여겼죠. 실상은 너무나 큰 절망에 베헤리트가 반응했을 정도인데요.
그리피스에게 있어 가츠를 포기하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가츠의 손이 닿는 순간, 그리피스는 그런 미래를 다신 감내할 자신이 없습니다.
즉 여기서 '두 번 다시 널' 뒤에 생략된 말은 '포기할 수 없게 된다.'가 됩니다.

결국 가츠가 손을 대자, 베헤리트는 완전히 반응하고 맙니다.
그리피스는 피눈물을 흘립니다. 이는 일식이나 베헤리트와 같은 초현실적인 요인으로 인한 피눈물일까요?
저는 이 눈물이 말 그대로의 피눈물이라 생각합니다.

성을 위해 가츠를 바친 모순
그런데 어째서 그리피스는 그토록 소중한 가츠를 바치고 성을 선택했을까요? 가츠에 비하면 성은 '빛바랜 고철' 따위에 불과한데요.
먼저 일식 속에서 '빛'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볼까요?
그리피스가 성을 바라볼 땐 '멀리서 빛나는 성'이었습니다. 보이드는 그리피스를 꾀며 말합니다.
"저기 보이는 성이 무엇보다 빛나 보인다면"

반면 가츠는 어떤가요?
그리피스는 그야말로 빛 속에서 함께 걷고 있습니다.

'오직 너만이'
무엇이 더 빛나보이시나요?
그리피스 역시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리피스는 가츠를 바쳤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덜 소중한 것을 위해 더 소중한 것을 바친다니. 모순되게 들립니다.
그리피스의 시점
하지만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당시 그리피스는 고문으로 인해 몸과 정신이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고드핸드들은 그런 그를 농락했습니다.
매의 단 동료들이 기꺼이 그들 스스로를 바치길 원하리라고 가스라이팅 했죠.

그리피스는 이에 속아 넘어갔고, 그래서 가츠를 바친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그리피스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긴 '가츠'가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빛바랜 고철'이란 꿈을 이룩하길 원한다 여겼기에, '가츠'를 바친 것입니다.
'오직 너만이 내 꿈을 잊게 해 줬다. 오직 너만이.'
가츠를 바치기 직전 그리피스의 독백입니다.
직후 그리피스의 얼굴이 망가지기 전의 얼굴로 돌아갑니다. 결심을 내린 것이죠.

그리피스는 성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순간조차 가츠를 바라보고 있죠.
저 독백을 마저 이어볼까요?
'그런 네가 그 꿈을 꾸길 바라니, 바친다.'
그래서 그리피스는 처연히 웃습니다. 그리피스의 표정을 자세히 보세요.
단언컨대, 작가는 그의 표정을 심혈을 기울여 그렸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그리피스라면 '난 반드시 해내고 말 테니 안심해.'란 의미로 웃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도 했겠고요.
늘 가츠에게 지는 그리피스
결국 그리피스가 바친 것은 매의 단, 가츠가 끝이 아닙니다.
그는 가츠가 없는, 단순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만 살아갈 자신의 미래를 각오했습니다. 죽음보다 더 끔찍할 삶을요.
그리고 그 미래는 이 일식을 시작하게 만든 그리피스의 '절망'이죠. 가츠가 없는 미래.
생각해 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리피스는 가츠에게 단 한순간도 이긴 적이 없습니다.
그 시점을 말하라면 가츠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피스가 가츠보다 자신을 우위에 뒀다면 그는 가츠를 바치지 않았을 겁니다.
가츠를 바치기보단 가지길 원했겠죠.
하지만 가츠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는 지옥 같은 삶을 선택했습니다.
'두 번 다신 널'이란 독백은 가츠 앞에서 또 모래성처럼 허물어집니다.
결국 그리피스는 마지막 순간마저 가츠에게 졌습니다.
이것은 그리피스의 마지막 웃음을 더욱 애처롭게 만듭니다.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기로 결심한 좌절스러운 순간마저 가츠를 위해 웃은 것이니까요.
페무토로 전생한 그리피스
그럼 그리피스는 전생하자마자 가츠에게 고통을 주었을까요? 캐스커를 그가 보는 앞에서 범한 것 말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페무토로 전생한 그리피스는 이전의 그리피스가 아닙니다.
'전생'이란 표현은 단순히 사도나 고드핸드의 가죽을 뒤집어쓰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괜히 '전생(転生)'이란 표현을 쓴 것이 아닙니다.
표현 그대로 그리피스는 페무토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는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거리낌 없이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인 말입니다.
이를 확인할 가장 좋은 방법 역시 가츠였죠.
그리피스가 그 무엇보다 사랑한 존재. 가츠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면, 그가 해내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캐스커를 강간합니다.
캐스커와 연인이 된 가츠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아니면 캐스커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만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리피스는 그를 구하러 온 가츠의 목을 조르려다가도 눈물을 보자마자 오히려 손을 잡아줄 정도로 가츠를 사랑했습니다.

복수심이니 질투심이니, 그리피스에게 가츠에 대한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캐스커를 범함으로써 페무토는 가츠를 괴롭히는 것까진 성공했죠.
이제 그를 죽이면 끝입니다. 그는 인간 시절의 자신을 완전히 끊어내고 온전한 고드핸드 페무토로써 탄생하게 됩니다.
그때 해골기사가 나타나고 가츠와 캐스커를 빼내어 갑니다.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페무토.
손만 움켜쥐면 됩니다. 그럼 가츠는 죽습니다.
하지만, 페무토는 이내 손을 내립니다. 가츠를 죽이길 '포기'했다곤 못해도, '보류'합니다.

운명과 사랑
언뜻 완전해 보이는 강마의 의식은 불완전하게 끝났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제물인 가츠와 캐스커를 놓쳤기 때문이죠.
하지만 고드핸드로 다시 태어난 페무토가 사랑을 떨쳐내지 못한 것, 그것이 진정으로 강마의 의식을 불완전하게 만듭니다.
베르세르크에서 '운명'은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고드핸드들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운명을 바라는 대로 이끌어나가고 있다고. 확실히 겉으론 그렇게 보입니다.
악의 이데아는 인과를 조종해 그리피스를 탄생시켰고, 운명처럼 그리피스는 페무토로 전생했죠.
그렇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닙니다.
그리피스는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될 '운명'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고문받게 된 원인은 가츠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운명적으로 망가진 것이 아닌, '사랑'으로 인해 망가졌습니다.
그리피스가 바친 제물의 주체는 '운명'적으로 그를 추종하던 매의 단이 아닙니다. 그가 '사랑'한 가츠입니다.
결국 그리피스가 페무토로 전생한 이유는 '운명'이 만든 꿈 따위가 아닌 가츠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피스의 삶을 주도한 것은 '운명'이 아닌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너무나 크고 강력해 고드핸드로의 전생조차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습니다.
베르세르크에서 '사랑'은 '운명'처럼 강력해 보이게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위대한 힘을 발휘해 왔습니다.

끔찍한 일식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리피스가 사랑한 가츠뿐만 아니라
쥬도와 가츠가 사랑한 캐스커도 있죠.
가장 강력한 힘, 사랑
이것이 말하는 바는 단순히 인물들의 관계가 아닙니다.
언제나 '사랑'이 '운명'을 이겨온 것입니다.
앞서 그리피스는 항상 가츠에게 져왔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최후의 순간에도 '사랑'은 '운명'을 이길 것입니다.
그리피스는 늘 그랬듯 가츠에게 질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비극일까요?
사랑하는 이에게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니듯이, 사랑하는 이에게 지는 것은 진정한 패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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